- 다양한 주제에 대해 자유롭게 글을 작성하는 게시판입니다.
Date 16/01/03 12:58:37
Name   눈부심
Subject   홍등가 같은..
동네에 저녁이면 창가에 빨간 불빛으로 빛나는 집이 있어요. 개산책시키느라 그 집을 지날때면 빨간 조명등효과 때문에 순간 홍등가에 와 있는 듯한 착각이 들어요. 홍등가라고 하면 여성들이 남자들을 유혹하며 몸을 파는 곳이죠. 오로지 불빛 때문에 밤이면 제게만 홍등가로 돌변하는 그 집은 왠지 이국적이면서 애틋한 노스탤지어를 불러일으켜요. 제가 꼬꼬마였을 때 그러니까 1970년대나 80년대 쯤 그리고 사춘기가 되어서도 유흥업소란 건, 요즘처럼 젊은이들이 가로수에 기대어 토악질을 하거나 시끄럽게 고성방가로 사람들을 괴롭히는 곳이 아니고  조용한 미지의 세계였어요. 거기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제가 알아선 안되었죠. 낮에 발견하게 되는 무슨무슨 실비집은 항상 닫혀 있었던 것 같아요. 너무 어려서 내가 알거나 보아선 안되는 일이 뭔지도 잘 몰랐던 것 같아요. 내가 들어가면 큰일나는 저 곳에선 어른들이 마구 섹스를 하는 걸까란 생각을 했던 것 같기도 합니다. 에이 설마 우리가 손대면 안되는 술을 마시는 곳이니까 들어가면 안 되는 건가봐 이렇게 생각을 고쳐먹었던 것도 같고요. 뭘 궁금해 했는지 잘 기억이 안 나요. 아무튼 들어가면 혼나는 곳이었고 감히 호기심을 가질 생각도 못했던 곳이면서 누구도 그 곳에 대해 얘기해 주지 않으니 신비로운 미지의 세계이기도 했어요.

서울에서 잠시 대방역 고시원에 머물렀을 때 바로 옆집이 유흥업소였어요. 밤이면 빨갛게 불이 밝혀지고 커다란 유리창 너머에 웬 여자분이 서 있었죠. 왠지 모르겠는데 그거랑 비슷한 우리 동네 빨간 불빛이 저는 너무 좋아요. 



저 집의 홍등가 같은 불빛을 보면 사춘기 때 시청했던 MBC베스트셀러극장 < 노란 반달문 >이 생각납니다. 서영은 작가의 원작을 연출한 단막극이에요.
no1.jpg

제가 무척 좋아하는 영상예술이에요. 주인공이 꼭 저와 같은 사춘기소녀였는데 극 속 소녀의 시선으로 본 세상이 꼭 제 눈을 옮겨놓은 것마냥 닮아 있었어요. 전학 온 여학생의 엄마는 <노란 반달문>이라는 술집을 운영하는 곱디 고운(원래 캐릭터 상 그렇게 해석되어야 하는) 분이었죠. 화려한 한복을 차려입고 빨간 립스틱을 삐죽거리며 남자 손님들과 이야기하는 친구엄마의 간드러진 목소리가 소녀의 귓가에 맴돕니다. 호기심에 놀러가 본 전학 온 친구의 집은 친구엄마가 은밀하게 낯선 남자분을 맞아들이고 집안 어디로 숨어버리자 역시 미지의 세계로 돌변합니다. 옛날 티비프로가 그렇듯 연출이 촌스럽지만 이 단막극은 제게 꽤 깊숙하게 각인되었어요. 특히나 주인공 김민희가 도장인주를 입술에 빨갛게 발라보던 장면이 제일 애틋했어요.

저희 동네 블럭에서 코너만 돌면 보이는 집인데 빨간 조명불빛이 비칠 때면 노란 반달문을 바라보는 소녀가 되는 것 같습니다. 그러면서도 실상은 그 집 개 두마리랑 우리집 개랑 앙숙이라 왈!!왈!!왈!!왈!! 난리도 아니라는.. 우리집 녀석은 지도 개면서 왜 그렇게 개를 싫어하는지 모르겠어요.



0


    목록
    번호 제목 이름 날짜 조회 추천
    공지 티타임 게시판 이용 규정 2 Toby 15/06/19 35022 1
    15878 창작또 다른 2025년 (3) 3 트린 25/12/04 277 2
    15877 스포츠[MLB] 코디 폰세 토론토와 3년 30M 계약 김치찌개 25/12/04 211 0
    15876 창작또 다른 2025년 (1), (2) 8 트린 25/12/03 453 7
    15875 기타유럽 영화/시리즈를 시청하는 한국 관객에 관한 연구(CRESCINE 프로젝트) 19 기아트윈스 25/12/03 557 2
    15874 일상/생각큰일이네요 와이프랑 자꾸 정들어서 ㅋㅋㅋ 14 큐리스 25/12/02 944 5
    15873 오프모임12월 3일 수요일, 빛고을 광주에서 대충 <점봐드립니다> 15 T.Robin 25/12/01 546 4
    15872 경제뚜벅이투자 이야기 19 기아트윈스 25/11/30 1504 14
    15871 스포츠런린이 첫 하프 대회 후기 8 kaestro 25/11/30 434 12
    15870 도서/문학듣지 못 하는 아이들의 야구, 만화 '머나먼 갑자원'. 15 joel 25/11/27 1040 27
    15869 일상/생각상남자의 러닝 3 반대칭고양이 25/11/27 695 5
    15868 정치 트럼프를 조종하기 위한 계획은 믿을 수 없이 멍청하지만 성공했다 - 트럼프 행정부 위트코프 스캔들 6 코리몬테아스 25/11/26 899 8
    15867 일상/생각사장이 보직해임(과 삐뚫어진 마음) 2 Picard 25/11/26 687 5
    15866 일상/생각기계가 모르는 순간 - 하루키 느낌으로 써봤어요 ㅋㅋㅋ(와이프 전전전전전 여친을 기억하며) 5 큐리스 25/11/25 622 0
    15865 경제주거 입지 선택의 함수 4 오르카 25/11/25 647 3
    15864 철학/종교진화와 창조, 근데 이게 왜 떡밥임? 97 매뉴물있뉴 25/11/25 1866 4
    15863 일상/생각창조론 교과서는 허용될 수 있을까 12 구밀복검 25/11/25 1054 17
    15862 기타★결과★ 메가커피 카페라떼 당첨자 ★발표★ 11 Groot 25/11/23 613 4
    15861 기타[나눔] 메가커피 아이스 카페라떼 깊콘 1 EA (모집마감) 31 Groot 25/11/21 673 3
    15860 일상/생각식생활의 스트레스 3 이이일공이구 25/11/20 712 1
    15859 일상/생각누구나 원하는 것을 얻는다. moqq 25/11/20 644 7
    15858 오프모임[취소] 11월 29일 토요일 수도권 거주 회원 등산 모임 13 트린 25/11/19 768 3
    15857 경제투자 포트폴리오와 축구 포메이션2 2 육회한분석가 25/11/19 474 3
    15855 의료/건강성분명 처방에 대해 반대하는 의료인들이 들어줬으면 하는 넋두리 46 Merrlen 25/11/17 2009 2
    15854 경제투자 포트폴리오와 축구 포메이션 육회한분석가 25/11/17 560 6
    목록

    + : 최근 2시간내에 달린 댓글
    + : 최근 4시간내에 달린 댓글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