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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15/11/01 09:01:38
Name   뤼야
Subject   모옌 [열세걸음]으로 생각해보는 세계문학
이 세계의 문학에는 일종의 경향성 같은 것이 존재합니다. 영미권은 대체로 이지적인 소설이 많고, 유럽은 인문주의에 입각한 소설이 많죠. 유럽에서 따로 떨어뜨려 프랑스와 옆나라 일본의 경우 사소설(私小說)의 경향이 강합니다. 물론 이건 일반적인 경향성일 뿐 모든 작가에게 적용하기는 어렵습니다. 일본문학의 영향을 지대하게 받은 요새의 우리 문학계 역시 일본식 사소설적 성격이 짙은 작품이 주를 이루고 있습니다. 저는 이런 사소설을 별로 크게 치지는 않습니다. 작가와 어떤 식으로든 코드가 맞아떨어질 경우는 굉징히 재미있게 읽는 수도 있지만, 대부분의 경우는 그렇지 못합니다. '일기는 일기장에!'라고 외치며 책장을 덮습니다.

또한 저는 이러한 사소설을 ''작가로서의 야망이 무척이나 작다'고 평가합니다. 작가가 되기 위한 작품일뿐, 이 땅의 작가로서의 소명의식을 찾아보기는 어렵죠. 장정일의 표현을 빌리자면 '소설가가 아니라 소설가이고 싶은 내가 하는 이야기들이죠. 한국의 많은 작가들이 이런 사소설의 함정에 빠져있는 것은 독자로서 조금은 아쉬운 부분입니다. 한국문학이 여타 세계의 문학과 구분지을만한 특별한 서사의 전통을 이어가는 모습은 이로서 찾기 어려워졌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영미권이나 유럽에서  'New Voice'라 칭하는 이민 2,3세대의 작가들이 아주 독특한 자신만의 목소리로 내놓는 작품들을 접할 때면 이런 아쉬움은 더욱 커집니다.

지난 추석 연휴가 시작되기 전에 중국의 작가 모옌의 작품들을 온라인서점에서 모두 주문했습니다. 문학동네에서 펴낸 모옌의 [열세걸음]을 무척 인상깊게 읽은 터라 그의 나머지 작품들도 시간이 난김에 몰아서 읽으려구요. [술의 나라]의 경우 두 권으로 펴낸 것중 2권은 구할 수가 있었는데 1권은 검색이 가능한 서울시내의 모든 서점에서 품절이 되었더라고요. 수소문끝에 울산의 북스리브로에 한권의 재고가 남아있는 것을 발견해 전화로 직접 주문을 했습니다. 이럴 때는 진짜 조마조마해요. 도서관에서 책을 훔치고 싶어질까봐요. 저는 도둑*이 될 뻔한 위기에서 구해주고 서가에서 책을 빼내서 아무에게도 팔지 않을 것을 약속한 서점직원분께 감사드립니다.

제가 예전에 쓴 글을 읽어보신 분은 아마도 문학의 모더니즘은 '화자의 문제'로 압축될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하고 계실겁니다. 그러니까 이야기를 전하는, 세계를 비추는 투명한 눈에 대한 회의의 극단이 '내가 말할 수 있는 것만 말할 수 있음' 그러니까, 약간 어려운 용어로 '의식의 흐름기법'까지 이어지게 되었다는 이야기들 말입니다. 대표적인 작품이 마르셸 푸르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나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스]같은 작품이지요. 후에 리얼리즘은 약간 낡은 것으로 취급받는 것이 사실이지만, 로컬리티를 기반으로 쓰여진 리얼리즘 소설은 여전히 보편적인 진실을 갈망하는 독자에게 호소력을 갖고 있습니다.

모옌의 [열세걸음]같은 경우, 화자의 모더니티를 모옌만의 방식으로 새롭게 환기시킵니다. 하나의 사건을 두고 '나'의 이야기가 이어지는가 하면, 이야기를 듣는 네가 갑자기 나 또는 우리가 되어 '나'의 이야기를 또 다른 '나'가 되어 이야기를 하지요. 모옌은 나는 네가 되고, 너는 내가 되는 독특한 상호보증의 방식으로 자신만의 모더니티를 획득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기법적인 측면에서도 독보적이기는 하지만, 문화혁명을 배경으로 분필을 먹어야만 이야기를 하는 괴물을 등장시켜 시대를 풍자하는 강력한 필력에서 중국의 수많은 인구를 대표하는 작가의 힘을 느끼게 됩니다. 뭐랄까요. 힘이 넘쳐요. 사소설의 나약함에 질려가고 있던 차에 이런 힘있는 작가를 만나면 갑자기 책을 읽는 안구에서 빛이 발사되는 느낌이 들지요.

문화혁명을 배경으로 중국과 중국인을 풍자한 대표적인 소설로 위화의 [허삼관 매혈기]가 있죠. 풍자의 강도로만 치자면 중국을 대표하는 노신, 위화, 모옌의 것은 유럽의 인문주의를 대표하는  대중적인 작가인 밀란 쿤데라가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서 보여준 풍자의 강도보다 훨씬 강력합니다. 자비라고는 없는, 그야말로 처절하게 느껴질 정도의 풍자력(?)을 보여줍니다. 위화나 모옌 모두 노신의 영향을 지대하게 받았음을 그들의 작품을 읽어보면 단번에 느낄 수 있습니다. 모옌 자신도 그의 작품 [사십일포]의 서문에서 노신의 영향을 받았음을 밝히기도 했구요.

영미권의 작가들은 하나의 경향성을 딱히 짚어내기 어렵습니다. 영미권 문학이 보여주는 다양성과 다채로움은 한번 그 매력에 빠져들면 헤어나기 어렵죠. 이민 2,3세대의 새로운 목소리를 수혈받고, 격려하여 문학을 더욱 풍성하게 하려는 노력이 영미권의 유수한 문학상을 받은 작품에서 드러납니다. 이창래의 소설 [영원한 이방인]이 미국에서 얼마나 많은 찬사를 받았습니까? 그가 그려낸 한국 이민 2세대의 이야기는 많은 이민 1세대의 심기를 불편하게 했다지만요. 자국의 문학을 풍성하게 하려는 노력은 프랑스에서도 나타납니다. [죽은 군대의 장군]을 펴낸 알바니아의 작가 이스마엘 카다레, [외상은 어림도 없지]를 펴낸 아프리카의 작가 알랭 마방쿠는 모두 불어로 글을 쓰고 있고, 프랑스어로 씌여진 문학에 주어지는 많은 문학상을 휩쓸었습니다.

영국의 문학을 살펴보자면 한국에서도 인기가 많은 작가인 [암스테르담]의 이언 매큐언, 그보다 앞선 [프랑스 중위의 여자]의 존 파울즈, 그리고 존 파울즈에게 지대한 영향을 준 [나사의 회전]의 미국 작가 헨리 제임스가 떠오릅니다. 이상하게 헨리 제임스는 미국작가인데 영국 작가처럼 느껴져요. 영국작가들에게서 느껴지는 일종의 경향성에 헨리 제임의 작가적 특색이 많은 부분 겹쳐지기 때문인것 같습니다.모두 픽션과 리얼리티를 자주 넘나들며처럼 일종의 지적 유희를 선보이지요. 이런 소설들을 읽게 되면 작가가 얼마나 영리한가에 대해 계속해서 감탄하게 됩니다. 요새 열린책들에서 펴낸 존 파울즈의 [마법사]를 읽고 있는데, 이 소설은 상하 1000페이지 가까이가 됩니다. 이 긴 이야기를 엮어가는 사건은 정말 너무 단순합니다. 그리스의 한 섬에서 괴짜 은둔자와 여자를 쉽게 홀리는 재주를 타고난 젊은 남자가 일종의 자기기만적 페르소나 게임을 한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도 전혀 지루하지가 않아요. 정말 영리하죠.

미국은 그 전통이 비교적 짧음에도 불구하고 좋은 작가가 너무나 많습니다. 경향성도 아주 다양하고요. 생존이라는 절대성앞에 쓰러지지 않는 인간성을 보여주는가 하면(헤밍웨이), 히피들의 반문명적 반항(리처드 브라우티건,잭 캐루악)이라는 또 하나의 경향, 미국의 남부정신을 풍자한 윌리엄 포크너, 그리고 건조하고 자비없는 문장으로 미국의 국경 3부작을  펴내며 미국 문학의 전통을 새롭게 환기 시키고 있는 코맥 맥카시 등등 정말 너무나 많은 작가들이 영미권이라는 말로 뭉뜽그리는 것이 미안할 정도의 필력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얼마전에 애인이 이런 한국적 서사의 전통을 이을만한 작품을 평생의 업으로 삼아 꼭 이루겠다는 다짐을 했더랍니다. 얼마나 힘든 작업일지 저는 상상이 안됩니다. 그러나 이왕 작가가 되기로 마음을 먹었으면 야망을 가져야죠. 저는 창작이 얼마나 진빠지는 일인지 알고 있습니다. 그냥 편히 좋은 작품을 읽는 게 복입니다. 일요일 아침인데, 앞으로 어떤 책을 읽어볼까 잠시 망설이며 이것저것 뒤지다가 제가 이제까지 많은 작품을 읽어오며 느꼈던 것들을 한 번 정리해 보았습니다.

좋은 휴일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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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미워도 다시 한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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