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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19/05/29 23:19:37
Name   Xayide
Subject   알콜 혐오 부모님 밑에서 과다 음주자로 사는 이야기
아버지의 형제분들 중
한 분은 알콜중독으로 돌아가셨고
한 분은 알콜중독으로 치료를 받으십니다.

외할아버지는 술로 세상을 등지셨구요.


그래서인지

초등학교 때 아버지 담배를 훔쳐 피웠을 때 아버지는
"이야, 이제 니가 크면 맞담배 할 수도 있겠다!"
라고 껄껄대셨죠.

정작 동생과 저는 그 때 담배의 역겨움에 놀라 지금까지도 비흡연자고

아버지는 한쪽 폐는 반을, 다른쪽 폐는 2/3을 잘라내시고
수술이 끝나자마자 의사선생님께

"그럼 이제 담배 펴도 됩니까?"

라고 물어보시고

"죽고 싶으실 때 피면 됩니다."

라는 말에 결국 강제적으로 금연당하실 정도이시고
그래서인지 자녀의 담배엔 관대하지만

술 만큼은 한 잔도 하지 않으시고
'방에서 먹는 건 뭐라 하지 않겠지만, 거실까지 나와서 술 먹는 꼴은 못 본다. 마실거면 내 눈 밖에서 마셔라'
라고 엄금하셨을 정도이시죠.

매년 딱 한 잔, 설날에 '음복'한다고 마시는 거 빼고요.
그리고 딱 한 잔으로 얼굴이 시뻘개지시고
드신 날은 아무것도 못 하십니다.


어머니도 외할아버지 제사 때는
술 좋아하시던 분이니까 좀 큰 잔 따라드리자 이렇게 하시지만
'술 그거 맛 때문에 먹는게 아니라 분위기 때문에 먹거나 현실 잊으려고 먹는거 아니냐?'
라는 생각을 지니셨습니다.


동생은 회사 회식 때
술 평소보다 좀 과도하게 마셨다고
주저앉거나 쓰러지거나 할 정도로
아버지 닮아서 알콜 내성이 없구요.


문제는 저입니다.

대학 입학할 때
신입생 환영식에서 저는 처음 술을 접했습니다.

소주 세 병까지 마시고 제 방에 들어와서

'술은 맛이 없지만, 취했을 때의 기분은 좋구나'라고 느끼며 잠들고

나중엔 '술이 사이다보다 비싼데, 같은 값에 같은 즐거움이면 사이다가 이득 아닌가?'라는 생각에 빠져, 저도 다른 가족들처럼 술을 찾지 않게 되었습니다.

술자리에서의 술은 마셨지만
그건 술 자체의 맛보다는
동아리 멤버들과의 친목과 분위기, 그리고 즐거움 때문이었지요.


연애를 시작 할 때

연인과의 단 둘이서의 술자리 라는 것을 처음 배웠습니다.
맥주를 좋아하던 연인에 맞춰, 저도 맥주에 맛을 들였습니다.

단 둘이서 하는 술자리에서의 분위기가 좋았기에
맥주에 익숙해졌고

힘들 때 혼자 마시는 것도 배웠습니다.


실연 후

다른 지역에 사는 친구에게 놀러 가기 위해 비행기표를 예매하고 나서

친구가 부탁해왔습니다.

"야, 제주공항 면세점에서 잭 다니엘 젠틀맨 잭 한 병 사다주라."

위스키는 부자들의 전유물이라 생각하던 제게
그런 생소한 술의 이름은 '너도 성인이고, 즐길 가치가 있다.'라 말하는 듯 했습니다.


첫 한 잔은 끔찍했습니다.

친구는 얼린 블루베리가 담긴 접시로 안주를 하라 해서, 위스키 한 모금에 블루베리 두 줌을 입으로 쑤셔넣어서 입을 씻어내는 느낌이었습니다.

익숙해지고 나자, 한 입에 블루베리 세 알이면 되었습니다.


집으로 돌아와서 그 맛을 잊지 못해

잭 다니엘 젠틀맨 잭을 검색하고

판매처가 안 보이자, 위스키 추천글을 검색하고

결국 조니 워커 블랙 라벨과, 제임슨과, 잭 다니엘 허니를 추천받았습니다.


지금은 조니워커 블랙 라벨 700ml를 3일이면 다 마셔버리고
잭 다니엘 허니는 공복이지만 밥 생각이 없을 때 홀짝홀짝 마십니다.

방에 숨어서 혼자
위스키 잔에다 가득 따라서 훌쩍훌쩍

힘들때도
울고 싶을 때도
피곤할때도
외로울때도

다른 지역에 사는 친구와
일이 너무나도 바쁜 친구와
이미 가정을 꾸린데다 술에 내성이 없는 친구와
다른 인연을 찾은 전여친 현친구와
술을 마실 수 없는 동생과

같이 만나 한 잔 할 수 없기에

혼자서 한 잔 홀짝홀짝
눈물 한 방울 훌쩍훌쩍



취하면 잠드는 술버릇 덕에
주변에 민폐는 안 끼치지만

빈 술병을 제때 못 치워서 발견 될 때마다

알콜 중독으로 고생하는 형이 있는 아버지나
외할아버지를 떠나보낸 어머니나
내성이 없어 술을 잘 못 마시는 동생은

같이 마시는 사람도 없이 혼자서
방 구석에서 숨어서 혼자서
마시는 절 보고

절 알콜중독에 준하는 것으로 보고 있지만


술 맛이 좋은 걸 어떡합니까
같이 마실 사람도 없는 걸 어떡합니까

국밥에 막걸리 두 병.
그런 소박한 행복도

연인이 없기에
시간이 되는 친구가 없기에
사정이 되는 가족이 없기에

혼자서 해야 하는데
혼자서 하고 있는데

방에서 혼자 마시는 것도 눈치를 봐야 하는데
친구 모두가 각자의 사정이 있는 걸 아니까
가족 모두가 각자의 사정이 있는 걸 아니까


결국 오늘도 핸드폰으로 노래 틀어놓고
안주 없이 혼자서

마시다 잠들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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